@은휼

 

 

한두어 방울씩 나뭇잎을 건드리는 것 같더니 어느새 부옇게 물안개가 만들어질 정도로 사납게 비가 내렸다.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간 태양이 잠시 자취를 감추는 사이에 용광로 같았던 아스팔트가 시원하게 샤워를 하기 시작하면, 어디서부터인지 모르게 비린내가 은근히 올라온다. 후두두둑 창문을 때리는 모양새가 꼭 차 안에서 세차하는 걸 지켜보는 느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리며 눅눅한 공기가 눅눅한 남자와 함께 훅 들어왔다.

 

식사하고 합시다~”

 

으갸갸갸. 오늘은 뭐 먹어요?”

 

어휴. 이메일 답장만 한 것 같은데 오전이 훅 갔네.”

 

간간히 전화 벨이 울리거나 복합기가 종이를 토해내는 소리만 들리던 사무실은, 식사하자는 말이 방아쇠라도 된 듯 갑자기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워지며 파티션 위로 사람들이 두더쥐 잡기 게임처럼 불쑥 불쑥 머리를 내밀고 일어났다.

 

우리 비도 오는데 차 타고 나갑시다. 김 대리 드디어 하나 뽑았다며? 시승해야지, 시승.”

 

이 날씨, 이 시간에 차 끌고 나갔다가 그냥 퇴근하셔야 될텐데요.”

 

으아~ 퇴근 좋지. 차 있는 사람들이 이런 날 봉사 좀 해줘. 딱 봐도 견적 나와. 이거이거 우산 써봐야 소용없어.”

 

어디서 뭘 먹을지부터나 정해요. 차 끌고 나가자고 해놓고 맨날 가던 중국집 가지 말고.”

 

저 아직 차 시트 비닐도 안 뜯었는데 여러분 마음대로 끌고 나가는 게 된 겁니까?”

 

쪼잔허긴. 그러니까 자네가 만년 김 대리인거야. 비닐 평생 안 뜯을거야?”

 

아니 그럼 홍 팀장님은 얼마나 쿨내 풀풀 나시길래 아직도 팀장이십니까? 허구헌날 봉사 받는 거 좋아하시니까 벌써 두피가 그렇게 쏘 쿨 하시지.”


오전 내내 일 더미에 숨 막혔던 사람들은 허리를 돌리거나 기지개를 펴며 부산스럽게 입구 쪽으로 모여들었다.

 

정 대리, 안 가?”

 

의자를 밀고 일어나 슬리퍼를 구두로 갈아 신고 조용히 옷매무새를 다듬던 여자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무심한 듯 물어보자 순식간에 모든 눈동자가 은휼에게 쏠렸다. 잠시 고개를 들었던 은휼은 자신을 향해있는 눈동자들이 허공을 가로질러 얼굴 앞에 모여 있는 듯 한 착각에 현기증을 느끼며 의자를 뒤로 젖혀 기댔다. 이 사람들은 내가 같이 밥을 먹는지 안 먹는지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궁금해 하는 걸까.

 

, 나는 약속이 있어서.... 먼저들 드시죠. 신경 써 줘서 고마워, 민경씨.”

 

대답을 기다리며 머리를 매만지고 있던 여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얼굴도 가릴 수 있을 법한 하얀색 클러치 백을 겨드랑이에 끼고 모여 있는 사람들 뒤로 또각거리며 걸어갔다. ? 정 대리 일주일에 네 번은 점심에 약속이 있다네. 진짜 약속이 있는 것 맞아? 내야 모르지 점심을 굶는 걸 수도 있잖아? 다이어트 하는가비지. 은휼의 코앞에 까지 들이밀었던 눈동자를 회수하고 매번 같은 질문을 자기들끼리 나누면서 두런두런 입구로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은휼은 불쾌해졌다. 들으라고 크게 말하는 모양인데 그렇다고 막상 은휼한테 대놓고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 그럴거면 건물이나 나가고 대화를 할 것이지. 교양들이 없어. 은휼은 미간을 좁히며 습관적으로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잠시 참았다. 그리고 개구리같이 볼을 부풀리고 한꺼번에 숨을 토해냈다. 그렇게 하면 왠지 좋지 않은 기분이 몸 밖으로 다 배출되는 것 같았다. 긴 손가락을 책상에 퉁기며 서류를 훑어 내리던 은휼은 마지막 검토가 끝나자 책상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던져뒀던 휴대폰을 집어 들어 1번을 길게 눌렀다. 익숙한 컬러링에 벌써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을 때 전화가 연결이 됐다. 여보세요? 하고 가녀린 목소리가 수화기 넘어로 들려왔다. 은휼은 그 목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좋았다.

 

누나, 어디쯤이야?”

 

 

 

 

 

 

 

 

 

@이림

 

 

마스크 팩을 뜯어 얼굴에 올려 놓은 지 채 3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시원했던 기운이 가셔버렸다. 가뜩이나 더워서 녹아 없어질 지경인데 하필 오늘 에어컨을 청소한다고 아주머니가 필터를 꺼내 가져가 버리셨다. 여름이 오기 전에 해주시면 좀 좋아? 어쩔 수 없이 선풍기를 틀어 돌려놨지만 에어컨을 대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림은 이 끈적끈적하고 뜨거운 계절이 너무 싫었다. 사시사철 가을 같으면 참 좋을 텐데. 손거울을 들어 팩이 잘 붙어 있나 확인하던 이림은 살짝 고개를 돌리고 눈동자로 벽을 더듬어 시계를 찾았다. 큰 오빠가 유럽 여행을 갔다오면서 안겨준 선물인데, 11시와 1시 방향에 아기 천사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는, 중세시대에나 있었을 법한 다소 엔틱한 벽시계다. 그다지 이림의 스타일도 아니고 전체적인 방 분위기하고도 맞지 않아서 마치 홍대 클럽 한 복판에 등장한 돈키호테 같았다. 볼 때마다 언제고 내가 꼭 저 시계를 떼버리고 말겠다 하지만, 이때껏 고장 한 번 나지 않고 큰 오빠가 몸소 달아 준 그 자리에서 째꺽거리게 내버려 둔지 6년도 더 되었다. 나팔을 들고 있는 천사를 잠시 노려보던 이림은 뜨끈해진 팩을 신경질 적으로 벗어버렸다. 약속 시간은 6시 반인데 아직도 11시도 되지 않았다니. 그냥 미리 나가서 어디 시원한 백화점이라도 들어가 쇼핑하고 있는 게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건강해지는 방향이라고 생각한 이림은 화장대 앞에 앉아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머리에 한참 웨이브를 넣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나자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바탕화면에는 이림과 그녀의 절친한 친구가 어깨동무를 하며 서로 최선을 다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척을 하고 있었다. 사진을 보고 피식 웃던 그녀는 그 친구에게 연락했다.

 

- ? 나 지금 곧 수업 들어가야 돼.

 

. 여보세요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 누군지 뜨는데 뭔 여보세요야 새삼스럽게. 급해?

 

. 급해.”

 

- 뭐야 무슨 일인데?

 

너 수업 언제 끝나?”

 

- 1시간 반 뒤에. 내가 너한테 내 시간표도 줬잖아.

 

아 맞다.”

 

- 아 맞다 하고 있네. 나 언제 끝나는지 물어보는 게 급한 건 아니실테고?

 

수업 끝나고 뭐해?”

 

- 글쎄. 점심 대충 먹고 종로에 서점이나 갈까 했는데. 이번에 베스트셀러가 괜찮다 그래서 한 번 보러 가려구.

 

나랑 백화점 가자.”

 

- 뭐하러?

 

서점 가면 책 사러 가는 거고, 영화관 가면 영화 보러 가는 거고, 백화점 가면 옷 사러 가는 거지 뭘 뭐하러야.”

 

- 너 옷 골라 달라고?

 

아니. 니 옷 사러 가자.”

 

- ......이림아.

 

이번엔 싫단 소리 말아. 너 생일 선물 아직도 못 사줬단 말이야. 생일 선물이라 치면 되지.”

 

- 생일 선물을 무슨 백화점에서 사.

 

선물은 내가 해주는데 어디서 사주는지 너가 왜 신경 써. 좀 이따 내가 너 학원으로 픽업하러 갈테니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을 수 있도록.”

 

- 아 이림아~ 나 부담된단 말이야.

 

시끄러. 맨날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고 유람선만한 운동화 신고 다니지 말고 이 기회에 예쁘게 꾸며보자. 우리 수애도 남자 좀 사귀어 보셔야지.”

 

- 남자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난 원빈 아니면 안된다니까?

원빈이 널 보시면 참도 이쁘다고 데려가시겠다. 이상한데 튈 생각 하지 말고 수업 끝나면 얌전히 딱 기다려. 지금 수업 들어가야 된다며. 수업 잘 하고. 빠잉.”

 

- . 이림아.

 

흡족하게 통화 종료를 누른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런 생각을 해 낸 자신이 대견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방을 빙글 빙글 돌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평일 오후라 백화점은 한가할 것이다. 미용실도 예약할까? 아냐, 우선 점심을 먹고, 옷을 사고, 구두도 사고, 가방도 하나 사고, 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가자. 미용실은 이림의 이름으로 들어가면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까 예약까지 해서 시간에 쫓길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수애를 위해 계획을 짜느라 더위 때문에 생겼던 짜증이 언제 없어져 버렸는지도 몰랐다. 오늘이 바로 수애가 변신하는 역사적인 첫 날이 될 거였다. 그리고 그 변신의 1등 공신은 나, 이림인 것이다







Posted by 엔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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